전역을 눈 앞에 두며 밤마다 침상 위에서 노트를 펴며 초절정센티모드로 쓴 전역사(?)다.

  군에서 쓴 마지막 글이자, 나 자신에게 던지는 출사표랄까. 정말 다시 읽으니 손과 발이 오그라든다. 앞 부분은 정말 읽다읽다 차마 키보드로 못 쓰겠어서 생략한다. 정말 나는 무슨 작품 따위를 쓰려고 한걸까... -_-;;;


  ... (생략) ... 대한민국에서 남아의 육체를 타고 태어난 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한다는 바로 그 곳,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곳에, 정말 내가 발을 디뎠다. 뭇 남성들에게 특별한 의로 다가오는 그 곳, 102보충대였다.

  부모님과 이별하고 TV 어느 다큐멘터리로 보았었던 익숙한 그 막사 안에서 우연히 만났던 동창과 생면부지의 입소장정들과 2박 3일을 보냈다. 다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어찌나 그리 물을 찾던지.. 목이 타들어가는 그 초조함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거 같다. 둘째날 저녁. 자대분류를 통해 처음으로 12사단, 앞으로 평생동안 기억에 남을 나의 부대의 이름을 들었다. '어떤 곳일까?' 하는 기대감과 '힘들겠다, 고생 좀 해라'라는 생활관 동기들의 말로 인한 조금의 두려움을 가지고 나의 진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첫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을지신병하나대대 제 1중대 1소대 3분대 62번 훈련병. 그게 앞으로 5주간의 나의 이름이자 내 가진 전부였다.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는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은 최고조였었나보다. 첫 종교행사가 어찌그리 감격스러웠던지.. 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다행히 훈련을 받는 동안 큰 어려움 없이 (근데 행군은 좀 ... ) 5주가 지나서 이등병이 되었다. 간절함 가운데서 그 분을 어떻게든 신뢰하고자 했기 때문인지 정말 특이한 케이스로 다시 신교대로 자대배치를 받아 돌아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연대 인사과의 터무니없는 행정착오에 의한 것이었지만, 단지 우연으로만 보기에는 내겐 참 특별했다.


  동기가 조교로 들어오고 하루 뒤에 내가 또 다시 "갑툭튀"하면서 3중대와 연을 맺었다. TV에서, 인터넷에서나 보던 무시무시한 상/병장들과 선임들, 간부들을 처음 보았다. 게다가 훈련병 때 '와, 3중대 훈련병들 완전 불쌍해, 조교들이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게 생겼어'라고 하던 그 조교들이니...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으로 자대생활은 시작되어 버렸다. 그 때의 우리 중대는 훈련병 때도 느꼈지만 어마어마한 포스가 느껴지던 곳이었다. 조교들의 실력도, 그 자부심도 어느 중대를 막론하고 최고였고, 하나의 '가족'이라는 남자들만의 유대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가족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직 몸이 크던 시절(뭐 지금도 작지만은 않다ㅠ)이라 심부름만 갔다 오면 연신 땀을 흘려대서 '땀지훈'(-_-)이라는 별명도 가지게 됐다. 다행히 그런 모습들이 기특하게 보였는지 하루하루 인정받으면서 칭찬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고 (?) 있었다. 물론 가끔 엄청난 욕설과 함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일/이등병 때 신문을 가지고 중대로 올라올 때면 항상 교회의 십자가를 보며 아침을 맞이했었다. 아침 햇살에 밝게 빛나는 십자가를 보며 미소짓고 올라가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그 때는 뿌듯했고 보람찼었다. 전입오자마자 신병보호기간도 채 안 지난 상태에서 중대 단 한 명도 종교행사를 가지 앟던 그 곳에서 당당히 이등병 나부랭이가 혼자 예배를 드리러 가고, 계속 나가겠다고 말한 건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엄청난 행동이었다. 그런 용기가 그 때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안된다. 그 간절함으로 가끔 야간근무를 서서 사영리를 요약해서 전하기도 하고 (이 때 느낀건데, 정말 군대 가기 전에 기드온 수련회는 가야된다. 사영리를 달달달), 전역하는 선임들의 부탁으로 (조금은 장난 같기도 했지만-_-;) 진심으로 기도도 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계급이 차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가면서 조금씩 예전의 나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중대 서열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훈련병들과 후임들을 향한 나의 폭언/욕설 지속능력(마우스 워리어)과 샤우팅 데시벨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고, 마시지 않겠다 다짐했던 술도 회식 때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죄 가운데 완전히 빠져 신나게 헤엄쳐댔다. 그러면서 나는 공동체에 있었을 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에 커다란 괴리감을 느끼며 고민과 갈등 속에 빠지기 시작했고, 영적 슬럼프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런 갈등 속에 자연스레 내가 사랑했던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마음의 거리감도 크게 느끼게 되었다.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예전부터 담아온 것들을 홀로 있게 된 그 시간에 직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대 군대에서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많은 것들을 맡고, 여러가지 일들에 도전했다. 이등병 때부터 목표로 해오던 군종병과 상담용사의 직책, 국방부 주관 병영문학상 입선 표창, 성탄절 성극 경연대회 1위 수상 등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고, 이 작은 성공들로부터 앞으로 세상 속에서 맞닥뜨릴 여러가지 도전들에 대한 성취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성탄절 때 추진한 무언극이었다. 내 제안에 적극적으로 신우들이 참여했고,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나가고 정당한 지원을 이끌어내어 성공적으로 극을 마치고 1위라는 구체적인 성과까지 얻어낸 이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얻은 교훈들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다. 한 사람의 작은 생각에 다른 사람이 모여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고, 안되는 것 같아보였던 선입견은 나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열정과 진정성은 반드시 인정받게 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성공적인 뭇 시간들을 보내고 나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병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죄성이란. 병장, 그리고 최선임병의 자리가 가져오는 지독한 보상심리와 매너리즘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해왔고, 끝끝내 그것을 온전히 이겨내지 못했다. 중대 내에 흐르는 좋지않은 조직 분위기 속에 휩쓸렸던 내 자신을 보며 아직 나약하고 고칠 점 많은 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과 같다고 했지만, 그렇게 안 끝날 것만 같았던, 누구나 겪는 평범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나가오는 그 22개월 남짓의 시간이 모두 흘러 이제 나는 새로운 문턱 앞에 서있다. 지금의 나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 그리고 언젠가 이 날을 그리며 문득 이 글을 다시 보게 될 미래의 나에게 전하는 약속을 남겨보려 한다. (그래 보고있는데 진짜 오그라든다, 살려줘)

  이 곳에서 있었던 그 모든 시간들, 때로는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린 순간들도 있었지만 실패와 좌절의 순간, 승리와 기쁨의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 시간들을 잊지 말자. 이 시간들은 바로 내가 지금까지 보내왔던 시간들 중에서는 가장 특별했던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이 발전의 시간이었는지, 도태의 시간들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건 앞으로의 나에게 달려있다. 이 22개월의 시간을 내 인생의 비전, 목표와 연결할만한 가치가 있는 Dots of Life로 만들자. 주도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와 함께, 기본에 충실하더라도 조금의 여유는 꼭 가지자. 모든 면에 완벽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적인 인간상은 단순한 방향일 뿐 허상일지도 모른다. 방향은 견지하되, 지금의 나 자신의 모습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2010년 9월 9일, 기대와 설렘을 안고 들어온 이 을지신병하나대대의 그 문 그대로, 이곳을 거쳐나간 많은 선임들을 따라 나 또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앞서 세워둔 여러 계획들을 차근차근 밟아가려할 것이고, 물론 때로 실패와 좌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곳에서의 시간들을 능히 견뎌냈기에, 계속 할 수 있다는 그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또 앞으로 전진하기를.


  2010년 9월 7일로부터 2012년 6월 16일의 648일간의 추억을 이제 마칩니다.


  병장 윤지훈의 전역을 자축하며-


  그리고 함께 전역한 10-19기 동기들, 김종현, 김태호, 노상균, 최종범 이들의 전역 또한 축하하며-



  2012. 6. 16.

  예비역 윤지훈ㅋㅋㅋㅋㅋㅋㅋ

설정

트랙백

댓글